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울의 맛있는 집을 찾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첫째, 기사들에게 물어본다.
둘째, 기사들이 잘 가는 식당에 간다.
택시기사는 많은 손님을 태우고 다니면서 맛있는 식당에 대한 정보를 취득한다. 게다가 ‘입 짧은’ 운전자를 만족시키는 식당에 대한 정보를 운전자들끼리 공유하기 때문에 풍부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두 번째가 바로 ‘기사식당’에 해당한다. 기사란 공식적으로는 엔지니어를 의미하다가 70년대 무렵부터 택시나 트럭, 버스 등을 모는 운전자도 포함되기 시작했다. 특히 기사식당은 택시 운전자가 대부분의 고객이었다. 그 택시기사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하나의 특별한 식당 업태를 탄생시킨 것이다. 세계의 ‘기사식당’을 찾아가는 영상 프로그램도 만들어졌고, 뉴욕에 한국 기사식당 콘셉트의 레스토랑이 문을 열기도 했다.
‘치맥’과 ‘불고기’는 이미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었다. 기사식당 역시 굳이 영어나 타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kisasikdang'이라고 영어사전에 등재될 가치가 있다(기사식당의 가치와 맛에 대한 보증은 우리가 한다!). 기사식당에 담긴 여러 함의는 아주 복잡하고 구체적이다. 우리 시민은 그걸 인정한다. 맛있는 집, 기사들이 가는 집, 식당 그 이상의 서비스가 있는 집. 기사식당이라고 붙여 놓으면 일단 ’먹어주는‘ 집.
“1970년의 일이야. 문을 연 게. 처음에는 백반을 팔았지. 기사들 상대로.
여긴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라 기사들이 차 대놓고 밥 먹기 좋았지.
서울 시내에는 주차공간이 없었고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밥 파는 집이 없었으니까.”
서울 성북동의 기사식당인 ‘성북동돼지갈비’의 창업자인 강부자씨의 증언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 들었던 증언이다. 기사식당을 처음 누가 만들었는지 역사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러 언론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 집이 최초의 기사식당 중 하나인 듯하다. 택시기사에게 밥을 파는 식당이 여럿 있었겠지만, 기사식당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오래 영업해온 곳이라면 이 집이 최고(最古)일 것이다. 현재는 아들이 대를 이어서 영업하고 있다.
소설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장편을 쓴 1966년, 이때 이미 서울은 팽창하고 있었고 만원이었다. 이 소설은 동아일보에 연재해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고, 최무룡(최민수의 부친) 감독에 김지미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점점 공룡이 되어가던 서울의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기사식당은 시작됐다. 우선은 대중교통에서 택시의 비중이었다. 서울은 1970년 이전 도로 길이가 1,500킬로미터 정도에 그쳤다. 현재는 1만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인구는 넘쳐났고, 길은 적었으며 대중교통은 아주 모자랐다. 돈이 없는 나라, 그 수도인 서울은 공공 교통인 버스와 지하철이 담당하는 비중이 적었다.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운행하는 지하철 1호선이 탄생한 것이 1974년, 당시 인구가 700만 명이었다(2024년 현재 960여만 명). 인구 차이는 크지 않은데 열 개가 넘는 노선이 씽씽 다니고 거미줄 같은 버스가 이어지는 현재와 비교해보면 당시 서울의 대중교통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택시가 그 틈을 메웠다. 합승은 기본이고, 더블합승, ‘따따블합승’(각기 다른 행선지의 손님을 3명, 4명 함께 태우는 것. 물론 불법이었다)도 있었고 과당 요금이 판을 쳤다. 택시 잡기가 너무도 어려웠고, 기사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각성제를 먹고 일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의 택시기사는 하루 주행거리가 1백킬로미터 내외인데 당시에는 4, 5백킬로미터도 뛰었다.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게 바쁜 택시기사들을 수용하고 밥과 편의를 제공한 곳이 바로 기사식당이다. 카드가 없던 시절이라 동전 교환, 피로회복 드링크제 판매, 세차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 것은 물론, 혼자 와도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 기사식당의 특징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 한 가지. 왜 기사식당은 ‘불백’이 주 메뉴인 가게가 많을까. 불백은 매운 맛의 제육볶음과 달리 간장 양념의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형태다. 이는 기사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기사들은 구매력이 있었고, 그들의 요구에 맞춰 고기를 1인분씩 제공한 것이 바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기는 보통 2인분 이상이어야 하는 오랜 불문율을 기사식당이 깨버린 것이다. 수입 소고기가 아직 대량으로 들어오기 전이라 가격이 비쌌으므로 불백은 당연히 돼지고기이기도 했다.
자양동의 맹주 ‘송림식당’도 바로 돼지불백으로 크게 이름을 날린 집이다. 물론 1인분이다. 송림식당은 1981년 문을 열어 서울 동부권의 기사식당 문화를 이끌어간 집이다. 갓 지어 맛있는 쌀밥, 정성스러운 불백과 채소, 반찬들, 친절한 서비스까지 기사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는 집이었다. 90년대에는 기사들 사이에서 거의 독점적인 인기를 누렸다. 요즘은 기사들보다 일반인들의 맛집으로도 번성했다. 그래도 기사식당다운 구성과 기사에 대한 각별한 예우로 인기가 높다. 1인분의 고기를 정성껏 내주는데, 고기가 익기 시작하면 마늘과 상추를 잘라 넣고 시원한 나박김치 국물에 밥을 먹는 것이 이 집의 ‘루틴’이고 정석이다. 옛 기사식당의 느낌과 분위기를 잘 지켜내고 있는 데다가 품위까지 느껴지는 가게의 멋이 오롯한 곳으로 기사식당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첫 줄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에는 90년대 들어 유명한 기사식당이 크게 늘었다. 강남을 보자면 영동스낵카라는 ‘버스에서 영업하는 기사형 간이식당’이 유명하기도 했다(현재는 폐업). 신사동의 영동설렁탕도 기사들에게 인기 있었다. 역삼동 쪽에도 여럿 있었는데 불백 외에 코다리를 파는 역삼동북어집이라는 새로운 메뉴의 기사식당이 생겨나기도 했다(현재도 성업 중). 아무래도 주차에 문제가 없고, 편해야 하므로 기사식당의 입지는 외곽에 편중되게 마련인데 남산 일대에 돈가스집들이 기사식당으로 알려진 것도 특이한 케이스다. 남산의 점심시간 무렵은 아무래도 한가해서 택시들이 차를 대기가 수월했던 탓이다. 성북동에 여러 집의 기사식당형 돈가스집이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인데 성북동은 도심에서 가깝지만 낮에 택시들이 주차하기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식당에서 요령껏 주차 편의를 제공한 것도 주효했다. 지금은 번화하지만 예전에는 한적한 외곽이었던 연남동에 유명한 기사식당(감나무집 등)이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 또 있다. 서울 도심이지만 은근히 외진 느낌의 보광동 라인이다. 도심을 살짝 피해서 어떻게든 주차가 가능한 곳이 기사식당이 들어올 조건이 된다. ‘보광기사식당’은 그런 노포다. 이 집도 여러 음식을 팔지만 불백이 인기다. 하지만 주문 즉시 나오는 오리로스와 삼겹살도 놓치기는 곤란하다. 물론 1인분이 가능하고, 혼자 받는 상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곳은 갈치조림도 유명하다. 그것도 제주갈치다. 기사식당을 넘어서는 맛집이다. 이런 다양하고 맛깔진 메뉴에다 어떻게든 차를 댈 수 있어 현재도 일반인 만큼 기사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맛있는 음식을, 그것도 즉석에서 바로 익혀서, 그것도 ‘혼자서’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기사식당의 특징을 여전히 지켜간다.
취재차 들렀을 때 식사를 천천히 마치고 여유 있게 커피 한잔을 뽑아들고 나오는 기사들을 마주쳤다. 아, 이런 평안한 여유가 바로 기사식당의 맛 아닌가. 서울의 오랜 도시 전설은 기사식당이 한 축을 만들어왔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우리는 ‘맛’을 위해서, 기사들은 ‘맛과 편의’를 위해서 기사식당을 찾는다.
■ 글. 박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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